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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5 11:51
2016년 7월 10일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16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she came trembing, and falling down)
레 15:19-24, 눅 8:43-48

여러분, 우리는 때론 알게 모르게 신앙(信仰)에 대해서 좀 다이나믹한 요소(要素)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극적인 회심(回心) 사건이 있어야 한다든지, 회심 이후에 하나님께서 폭포처럼 부어주시는 은혜(恩惠)의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신앙에 몰두하는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든지, 이렇게 영웅담(英雄譚) 같은 요소가 있어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동일한 시대(時代)에 동일한 사건(事件) 속에서 동일하게 혼신(魂神)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위인은 단 한 사람(소수)이라고 말한다면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놀라운 경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위인’ 역시 한 사람에 불과해야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을 보면, 이런 ‘영웅담’과는 아예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결론에 이르면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는 말씀을 듣습니다. 뭡니까? 그 믿음을 인정받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여인은 ‘믿음의 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웅담과 같은 신앙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믿음의 사람(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 부족한 게 많아도 믿으면 됩니다. 오늘 구약성경 본문 [레15:19-24] 말씀을 보면, 여인의 유출증(혈루증)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혈(下血)이 있는 여인’은 ‘부정한 사람’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약성경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 역시 12년 동안 혈루증(유출증)으로 절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서에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마가복음에 [막5:26]를 보면, 이 여인은 자신의 혈루증을 고쳐보고자 많은 의사에게서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진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무 효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명 여인이 의사를 찾는 이유는 고침을 받기 위해서, 해결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막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런데 문제는 만나는 의사마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도 고통과 괴로움만 됐지 도무지 병은 낫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이 여인은 살아있는 자체가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인은 자신의 부족함이 절절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여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고인 혈루(血漏)를 가지고 있는 자는 ‘부정한 자’로 취급받는 시대에서 장장 12년 동안 그 불결함으로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사이에서 더 이상 나설 수 없는 낙인찍힌 여인이 된 것이지요. 이런 것이 자신을 참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세요. 이 여인에게 생긴 이 ‘놀라운 믿음’은 부족함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께 ‘한번 만나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믿음’ ‘한번 나가 만나보자’고 나서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옷자락(옷깃)만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막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사람들이 모르게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격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자들은 간혹 그런 것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율법을 지켰다, 말씀을 지켰다, 하면서 그런 것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감 있게 서려고 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들은 도무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은 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부족한 자라고 깨닫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거지요. 그렇게 나가는 게 바로 ‘믿음’입니다.
2. 소심(小心)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이제 ‘소심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소심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소심한 믿음’의 모습도 하나님 앞에서는 ‘값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마음먹고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는 주요한 사역에 곁다리 식으로 끼어 든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신의 집으로 가서 죽어 가는 딸을 고쳐달라’고 청했기 때문이지요. [눅8: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렇게 ‘야이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는 정도로 (참으로) 드라마틱한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그럴 용기(勇氣)도 없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청하고 싶었지만 누구나 다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예수님께 그렇게 청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그렇게 소리칠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마음먹고 행동한 일은 그저 몰래 예수님 가까이에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지는 것이 다였습니다. [마9:20-21]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그 행동은 아주 ‘소심한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오늘 말씀의 결론을 보면 감사하게도 소심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한다는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소심한 게 정상(定常)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믿음의 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우리(나)에게 굳이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은 예수님 자신이 잘 아시는 일입니다. 여인 또한 그 능력으로 자신이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압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은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이 아시고, 이 여인이 알면 된 것을 예수님께서 굳이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느냐고 그 만진 사람을 찾는 이유는 영웅주의에 빠져 있는 그 당시 사람들과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지요. “부족한 사람, 즉 죄인(罪人)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되는 거란다!” “너희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이 ‘소심한 일’이라도 괜찮다!” “순수한 믿음으로 행동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믿음 이란다!”